정조의 무덤인 건릉과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을 살펴봅시다

경기 화성시 안녕동 용주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인 융릉(隆陵).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불렀습니다.현륭원은 고종 때에 이르러서야 융릉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정조 때는 현륭원이라고 해야 하고, 오늘날에는 융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조는 현륭원에 자주 행차고 아버지의 효를 다했습니다.지금은 융릉으로 불리는 이곳에 들어가면 훌륭하게 자란 소나무 숲이 사람들을 그립게 맞이합니다.양지바른 곳에 놓인 사도 세자의 무덤을 기품 잘 감싼 솔밭에는 정조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보다가 송충이가 솔잎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며 한탄했대요.”내가 아무리 미물의 곤충이라고 해도, 무슨!비통하게 산것도 가슴 아픈 것에 어떻게 당신까지 괴롭히느냐?”와 그 자리에서 모충을 이빨로 물어 죽이닸다고 합니다.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들이 황급히 서두르고 송충이를 모두 거두어 버렸습니다.그 뒤 현륭원(융릉)주변에는 송충이는 없었다고 합니다.이 말이 사실일지는 별개로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도록 정조의 효심이 유별났던 것이 잘 알고 융릉을 잘 키우려고 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정조는 죽어도 아버지 곁에 있기만을 바랄 정도로 효도했다.현재는 융릉 서쪽 방향으로 정조를 모신 건릉이 있습니다.그러나 지금의 자리가 정조가 처음에 안장한 장소(이를 정조 풀 장지라고 합니다)이 아닙니다.처음에는 현륭원(융릉)동쪽 산 기슭에 묻혔습니다만, 후에 현재의 건릉의 장소로 옮겨졌습니다.

윤 태릉과 건릉은 많이 닮았어요.숲길이 끝나는 곳에 이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눈에 들어갑니다.홍전 문을 지나면 언덕 아래에 있는 정자각이 보이고, 정자각의 동쪽에는 고층 건물., 정자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습니다.정자각 건너 언덕 위에는 둥근 분구(사기상)이 있고 그 주변에는 영혼 유석, 노조미 주석, 토라이시 양이, 곡장, 문인석 무인석 등이 있습니다.분구의 바깥쪽으로 삼면을 둘러싼 낮은 담(곡 로이)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그러나 자세히 보면 차이가 보입니다.홍전 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의 좌우에 박석을 깔았던 것은 같지만, 그 세부는 다릅니다.호랑이와 양 형태의 석편이 있는 것은 같지만 그 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둥근 분구(사기상)가 있듯이 보이지만 융릉에는 병풍석만 있지, 건릉에는 난간석만이 있어요.건릉은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만 둘렀는데, 난간 돌이 있는 분지만이 많습니다.융릉·건릉은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2009년에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문화재로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융릉·건릉는 화성 팔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히는 장소에서 2개의 왕릉과 왕릉을 둘러싼 아름다운 숲길은 역사의 향기를 맡아봅니다.여기에 들어가면 울창한 숲길이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주는 맑은 공기를 듬뿍 느낄 수 있습니다.이 길을 걷다 보면 자연도 역사의 순간에 포함됩니다.화성시에서는 매년 10월이면 융릉.건릉 일대에서 “정조 효 문화제”를 개최하고 정조의 천만의 효심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정조 효 문화제에서는 정조 대왕의 화학 등 행차(왕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거제등이라고 표현한다)과 융릉(정조 당시 현륭원)의 제사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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